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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임(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가정교육과 교수) * 재가불자의 수행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涅槃)의 성취이다. 수많은 교리와 수행방법이 있지만 결국 그것은 이 한 가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한 경(經)에서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마치 어떤 왕이 전쟁을 하기 위해 4종의 군대[코끼리, 말, 전차, 보병]를 일으킬 때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의도만을 가지고 있다. 즉,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것처럼 부처님의 경전들은 여러 종류의 좋은 것[種種諸善]을 말하고 있지만 단지 모두 함께 (열반을 방해하는) 악[煩惱]을 공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출가 수행자이든, 재가 신자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불교신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목표이다. 역시 한 경전에서는 이것을 “갠지스 강이 바다 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지고, 나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부처님의 교단, 즉 출가자와 재가자는 열반으로 쏠리고, 기울어지고, 나아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타고난 근기(根機)와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궁극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 역시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팔만 4천 가지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8만 4천”이라는 숫자는 “매우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길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출가의 길과 재가의 길이다. 출가의 길은 가정을 버리고 사회를 떠나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승려의 길이다. 다른 한 가지는 가정을 가지고 세속 일에 몰두하면서 수행하는 재가 신자의 길이다. 출가 수행자의 길은 불교의 궁극 목표를 향해 직행하는 길이라면 재가신자의 길은 둘러가는 완행의 길이라 하겠다. 재가신자가 완행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처한 환경과 근기(根機) 때문이다. 목표는 같아도 처해있는 환경과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수행 방법도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출가 수행자는 주로 계(戒), 정(定), 혜(慧)가 핵심을 이루는 8정도를 닦음으로써 번뇌를 없애고 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반면, 재가신자는 주로 보시를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 다음 생에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서 좋은 생을 받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재가신자가 좋은 후생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 후생 가운데 언젠가는 열반을 얻는다는 전제하의 방편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러면 재가 불자가 닦아야 할 실천 덕목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8만 4천의 수많은 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들면 믿음(信)을 가지고, 계(戒)를 실천하고, 보시(布施)를 행하는 것이다. 이 3가지가 불교의 재가신자들이 실천해야하는 기본 덕목(德目)들이다. 1) 믿음(信: śraddhā)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어떤 절대자의 권능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불교인들은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불교행사에서 제일 먼저 3귀의를 봉송(奉誦)함으로서 항상 3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3보에 대한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응부경전에서는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다. “확고한 신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은 여래(如來), 응공(應供: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할 자), 정변지(正遍知: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자), 명행족(明行足: 지혜와 수행을 완성한 자), 선서(善逝: 깨달음에 잘 이른 자), 세간해(世間解: 세상을 아는 자), 무상사(無上士: 至高의 존재), 조어장부(調御丈夫: 길들여지지 않은 자들을 길들이고 안내 하는 자), 천인사(天人師: 신과 인간들의 스승), 불세존(佛世尊)이십니다”라고 믿는 것이다. 둘째, 법(法)에 대한 믿음이다. “확고한 신심으로 법에 귀의합니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습니다. 법은 명백하게 표명되었습니다. 법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법은 해탈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깊이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여기서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은, 법(法)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로서, “허심탄회하게 귀를 기울이면 누구라도 이해될 수 있는 것, 눈을 뜨고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할 때 법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셋째, 승가(僧伽)에 대한 믿음이다. “확고한 신심으로 나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의 승가는 선한 행동으로 생활합니다. 세존의 승가는 바른 행동에 따라 삽니다. 세존의 승가는 진실한 행동에 따라 삽니다. 4쌍 8배(四雙八輩: 4向과 4果의 성자)의 성자들로 되어 있는 세존의 승가는 올바른 행동에 따라 삽니다. 이것이 세존의 승가로서 존경을 받아 마땅하고, 공양을 받아 마땅하고, 음식을 받아 마땅하고, 합장으로 인사를 받아 마땅한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복밭입니다” 라고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초기 경전에서 말하는 믿음[信]이란 신비로운 것이나, 맹목적으로 강요된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부처님이란 어떤 분이고, 부처님께서 가르친 법은 어떤 것이며, 그 법을 따라 실천하는 승가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실히 알 때 생기게 되는 확신 같은 믿음인 것이다. 2) 지계(持戒) 지계, 즉 계(戒)를 받아 지닌다는 것은 수행의 근원이다. 모든 수행은 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불교에서 계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율법(律法)처럼 신이 내린 명령 같은 것은 아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체험적으로 알게 된 가장 효과적인 수행방법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정해진 계율을 똑같이 일괄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과 뜻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바새(우바이)가 받아 지켜야 하는 계는 앞에서 본 것처럼 원칙적으로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의 5계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5계보다 적은 계를, 반대로 더 많은 계를 받아 실천할 수도 있었다. 1계만을 받아 가지는 우바새[우바이]도 있고 2계, 3계, 4계를 수지(受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각각 일분행(一分行), 소분행(小分行), 다분행(多分行) 우바새(우바이)라고 했다. 그리고 5계를 모두 수지하는 사람을 만행(滿行) 우바새(우바이)라고 불렀다. 5계 가운데서 3번째 음행(淫行)을 금하는 계는 출가자와 재가신도 간에 다르게 적용된다. 출가자에게는 완전한 순결이 요구되는 반면, 재가자는 단지 삿된 음행[邪淫]만을 금한다. 그러나 어떤 재가신도는 스스로 완전한 순결의 계로 받아들여 아내를 포함하여 모든 이성과의 성관계를 끊는 일도 있었다. 이것을 단음(斷淫)이라 했다. 재가불자는 역시 8계를 수지하기도 했다. 이것은 포살(布薩, uposatha)이라는 이름으로 재가자에게 많이 권장되었다. 육재일(六齋日) 즉 매달 8, 14, 15, 23, 29, 30일에 하루 낮과 밤 동안 8재계(八齋戒)를 지키는 것이다. 8재계는 5계에다 6)높고 넓고, 화려한 평상에 앉지 말 것[不眠坐高廣嚴麗牀座], 7)향유를 바르거나, 꽃다발을 쓰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 것[不塗飾香鬘不歌舞觀聽], 8) 정오가 지난 뒤에 음식을 먹지 말 것[不非時食]등, 3가지 계를 보탠 것이다. 이 8계 이외에도 평생 동안 독신으로 출가자와 똑 같이 10계를 지키는 재가자도 있었다. 이것을 10계 우바새(우바이)라고 불렀다. 10계란 출가 사미(沙彌)가 수지(受持)하는 10계와 같은 것이다 . 재가자에게 계는 강제조항이 아니다. 그래서 재가불자의 계는 출가자가 받는 구족계와 달리 계를 위반해도 처벌이 없다. 출가자가 계를 범했을 때는 여러 가지 벌(罰)을 받아야 하지만 재가자의 경우는 단지 죄를 고백하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신도의 자격을 박탈하는 벌은 따르지 않는다. 3)보시(布施) 보시는 재가신자들의 수행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재가불자가 실천하는 수행의 중심 목표는 공덕을 지어서 사후에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그 공덕은 보시를 통해서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이 행하는 보시는 정신적인 것[法施]도 있지만 주로 물질적인 것[財施]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질을 베푸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그리고 아무에게나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을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된다고 한다. 첫째, 보시를 하는 사람이 청정해야 하고, 둘째, 보시하는 물건이 청정해야 하고, 셋째, 보시 받는 사람이 역시 청정해야 한다. 보시하는 사람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은 보시자가 계율을 잘 지키고, 바르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시물이 좋아야한다는 것은 칼이나 독약, 음녀(淫女)등과 같이 남에게 해를 주는 보시물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땅은 좋아도 나쁜 종자를 심으면 수확이 좋지 않은 것처럼, 나쁜 물건을 보시하면 공덕보다는 나쁜 과보를 초래한다. 보시 받는 사람이 좋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복밭[福田]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 종자를 뿌리면 수확이 많지만 척박한 땅에서는 좋은 종자도 조금밖에 열매를 맺지 않거나, 전혀 맺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코살국의 프라세나지뜨왕에게 “마치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얻는 수확은 한량없지만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도 없애지 않고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없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보시를 받는 사람들의 자격에 따라 그 결과에도 차이가 있다. 부처님은 (음식물 보시를) 보통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는 수행자에게 하는 것이 좋고, 수행자에게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에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보시를 받는 사람이 좋아야 하지만, 보시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보시 할 때는) 아끼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하고, 주고 난 후에 후회하지 않아야 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해야 한다. 뉘우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도로 받을 생각이 없으면 좋은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후기 대승불교의 보시정신은 자비심의 발로이지만, 초기불교의 보시 행위는 자신의 현세와 후세의 안락을 위한 것이다. 보시는 반대급부를 염두에 둔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윤병식, 종교철학과 노동의 의미, 즉 보시에 대한 공덕은 중아함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백배, 천배, 백천배, 또는 무한으로 결과가 되돌아온다고 약속된다. 그러나 보시문제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보시가 아무리 강조된다 해도 이것은 공덕, 윤회의 길이지 해탈 열반의 길은 아니라는 점이다. 열반은 공덕에 대한 과보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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